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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우리는 장진호에서 패배하지 않았다, 위대한 승리였다" 덧글 0 | 조회 28 | 2020-12-04 01:38:37
태곰  

━ 장진호 전투 70주년, 한국인 생존용사 인터뷰

70년 전 바로 이 순간 한반도의 지붕이라 불리는 개마고원에서 처절하고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1950년 11월 27일 시작돼 12월 11일까지 이어진 장진호 전투다. 미 해병 1사단과 보병 7사단이 주력을 이룬 유엔군이 인해전술의 중공군과 영하 30∼40도의 혹한이란 이중의 적과 맞서 싸운 극한 전투였다. 유엔군은 압록강으로의 북진을 눈앞에 두고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전장에서 물러섰으니 아군은 패배한 것일까.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장진호는 무슨 의미를 남겼을까. 미군과 중공군이 치른 전투의 참전자 중에는 소수의 한국인도 포함돼 있었다. 그 가운데 살아남은 두 사람의 용사와 흥남철수의 선상에서 태어난 사람을 찾아 인터뷰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서울 수복에 성공한 유엔군은 북진을 서둘렀다. 도쿄의 유엔군 사령부에서 전쟁을 총지휘하던 더글러스 맥아더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고향에 돌아가서 하게 해 주겠다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동부 전선을 맡은 미군 10군단 예하 해병 1사단이 10월 함남 원산에 상륙한데 이어 보병 7사단이 함남 이원에 상륙해 북진을 서둘렀다. 그 속에 장동욱(93)씨를 비롯한 한국인들도 포함돼 있었다. 미군 참전으로 긴급히 편성된 카투사 1기생 800여명이었다.

“부산 피난을 갔다가 징집에 응했는데 간단한 신체검사 후 K11로 시작하는 군번을 받고 바로 배를 탔다. 다음날 내려보니 일본 요코하마였다. 미군 부대에서 훈련을 받고 처음 투입된 실전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인천에서 수원·오산·병점을 거쳐 북쪽으로 퇴각하던 북한군과 전투를 벌인뒤 부산 수영비행장에 집결해 있다가 다시 수송선을 타고 함남 이원으로 상륙했다. 함흥을 점령한 뒤 곧 압록강까지 진격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이로써 전쟁이 끝나고 통일도 되는구나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오산이었다. 갑작스레 장진호 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중공군에 포위돼 고립되어 있던 해병 1사단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해병 1사단이 포위된 것은 중공군의 유인전술에 휘말린 결과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군 지휘부는 대규모의 중공군이 한반도에 주둔해 와 있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진호에 동원된 중공군 28병단은 12만명, 여기에 맞서는 미군은 해병대와 보병을 합쳐 3만명으로 중과부적이었다. 장 씨가 속한 31연대는 황초령과 고토리를 통해 장진호로 들어가 열흘 남짓 악전고투를 치렀다.

“해가 지고 밤이 되는 게 두려웠다. 중공군은 낮에 산속에 숨어있다가 밤만 되면 나팔소리, 피리 소리와 함께 기습을 해왔다. 말그대로 벌떼처럼 새까맣게 달려들어 백병전이 펼쳐졌다. 낮에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이 그렇게 폭격을 해도 중공군은 밤만 되면 나타났다.”

적은 중공군뿐만 아니었다. 문제는 추위였다. “나도 함경도 출신이라 어지간한 추위는 견디는 편인데 장진호는 전혀 딴판이었다. 더운 지방 출신의 미군은 대부분 동상에 걸렸다. 중공군은 더 심했을 것이다. 그 눈밭에서도 천으로 된 신발을 신었으니까. 낮에 중공군 20여명이 동사체로 눈에 파묻혀 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 아군도 마찬가지였다. 트럭에 싣고온 동사자들을 한꺼번에 웅덩이에 묻는 것을 봤다. 입에서 저절로 기도가 나왔다.”

소총 용수철이 얼어 사격이 제대로 안될 정도였고 손이 총신에 그대로 달라붙어 조준이 힘들었다. 수류탄 안전핀도 제대로 뽑히지 않았다. 많은 병사들이 장염에 시달렸다고 미군 전사는 기록하고 있다. 전투 식량을 얼음 상태로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연대장이 전사한 것을 비롯해 열흘 남짓 버티는 동안 많은 전우를 잃었다”고 장 씨는 회고했다. 철수 명령을 받은 그의 부대는 전투를 치러가며 장진호에서 120㎞ 떨어진 흥남에 도착한 뒤 배를 타고 묵호로 빠져나왔다. 국군 수도사단 포병에 전속된 그는 휴전 직전까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인 금성지구 전투에 참전했다. 아군이 전멸하고 혼자 중공군 적진에 남게 돼 열흘동안 빗물을 받아마시며 버티다 탈출에 성공하는 등 생사의 기로를 숱하게 넘나들었다. 인천상륙에서부터 장진호 전투를 거쳐 금성전투까지 거치며 불사조처럼 살아 남은 그의 개인 이력은 6·25 전사(戰史) 그 자체였다.

미군 통역장교로 해병 1사단에서 복무하다 장진호 전투의 처음부터 끝까지 치른 한국인도 있다. ‘존 리’란 이름으로 미 해병대 전사에도 등장하는 이용연 변호사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해부터 미국에 체류중인 그와는 국제전화로 인터뷰를 했다.

그의 부대는 장진호 남단의 하갈우리에서 다른 부대와 고립된 가운데 사투를 펼쳤다. “하갈우리의 전투병은 2개 중대 600명이 전부였는데 중공군은 11월28일부터 이틀간 1개 사단 병력으로 공격해왔다. 하지만 우리를 이기지 못했다. 밤새 전투를 치르고 날이 밝은 뒤 보면 수백명씩 중공군 시체를 보았다.”

그는 한국인 카투사 50명을 지휘해 무사히 철수시킨 공적이 있다. “장진호를 넘어와 우리 해병대와 합류한 보병사단 병력중에 카투사 100명 정도가 있었다. 나머지 카투사는 다 전사한 것 같았다. 그중에서 50명을 나에게 예속시켜줬는데 철수 도중 전투가 계속되는 와중에서도 병력 손실 없이 흥남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는 6·25 전쟁 전체의 물줄기를 가르는 분수령이었다. 유엔군은 인해전술과 혹한이란 철옹성에 막혀 북진을 중단하고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전쟁 사가들은 이를 ‘위대한 후퇴’라고 기록한다. 하지만 이 변호사의 생각은 달랐다. “미군이 유인 전술에 휘말려 포위당하고 철수를 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다. 하지만 중공군에 5만명 사상자를 내는 궤멸적 피해를 입혔다. 올리버 스미스 사단장의 말처럼 우리는 후퇴를 한 것이 아니라 공격을 한 것이다. 다만 공격의 방향을 바꾼 것 뿐이다.”

이 변호사의 평가는 이랬다. “미군이 북진을 중단한 결과만 놓고 본다면 ‘항미원조’를 내걸고 참전한 중국이 뜻을 이룬 것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전쟁의 일면을 본 것일 뿐이다. 미군이 장진호에서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28병단은 그 뒤 6개월간 남하해 오지 못했다. 궤멸적 타격을 입고 회복하는 데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만약 그랬지 않았더라면, 대구까지 밀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만약 그랬다면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지금 남아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장진호에서 숨져간 용사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선 장진호에서 살아돌아온 소수의 생존 용사들을 초신 퓨(Chosin Few)라 부른다. 이 변호사도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한 가운데 1980년 정식 사단법인이 결성돼 미 정부에 등록이 되어 있다. 초신은 장진의 일본어 발음이다. 당시 미군이 일본어 지도를 기반으로 작전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된 것이 지금도 이어져 오는 것이다. 미 해병대의 정예 이지스함 중에도 초신함으로 명명된 함정이 있다. 장진호 전투를 결코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장진호 전투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흥남철수다. 미군이 철수할 때 10만여명의 북한 피난민이 자유를 찾아 함께 남하했다. 탱크와 대포를 내려놓고 피난민 1만4000명을 태워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거제도에 도착한 빅토리아호의 이야기는 영화 ‘국제시장’을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그 속에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타고 있었다. 이 배 위에서 5명의 신생아가 태어나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중 한 사람인 이경필 장승포 가축병원장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진호 전투와 내 나이가 똑같습니다. 장진호 전투의 영웅들은 나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생면부지의 땅에서 동사(凍死)를 무릅쓰고 싸운 그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는 또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결코 잊어선 안 되는 게 장진호 전투입니다.”

장진호 70주년을 맞은 올해는 정부 주관의 추모 행사와 별개로 민간에서도 기념사업회(회장 이재춘 전 주러시아 대사)를 꾸렸다. 장진호 전투가 막을 내린 11일 인천 자유공원에서 기념행사를 갖고 13일에서는 거제도에서도 조촐한 기념회를 열기로 했다.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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