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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된다'는 믿음이 위험한 진짜 이유 덧글 0 | 조회 23 | 2021-01-06 14:18:55
뜨거운  

[오마이뉴스 글:윤일희, 편집:이주영]

'남근선망(Penis Envy)'이라고? 대학교에 들어가 이 주장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프로이트 책을 방구석에 집어 던지며 외쳤었다. "미친 새끼!" (5쪽)

마리 루티는 <남근선망과 내 안의 나쁜 감정들>을 이렇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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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루티는 앞선 저서 <나는 과학(진화심리학)이 말하는 성차별(젠더 불평등)이 불편합니다>에서 시대착오적인 진화심리학이 여전히 작동시키는 부정의한 젠더불평들을 이미 비판한 바 있다.

이번 책에서는 '남근'이라는 남성의 생물학적 특징이 어떻게 젠더 권력이 되는지를 밝히며, 젠더 이분법이 파생시키는 결혼의 특권화, 이성애를 강화시키는 성별에 대한 집착과 이성애 중심 섹슈얼리티, 포스트페미니즘의 '여성성 재코드화'를 파헤친다. 젠더 이분법에 갇혀 은폐되는 나쁜 감정들을 숨기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이에 근거한 '욕망의 특정성'이 성차별과 자본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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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드림'과 '나쁜 감정들'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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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남근선망과 내 안의 나쁜 감정들> 표지

ⓒ 앨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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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출신 저자 마리 루티는 러시아와 접경 지역에서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각박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2차 세계대전 후 피폐해진 핀란드는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고투를 벌인다. 가난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마리 루티의 부모는 아침부터 밤까지 고되게 일해야 했고, 비범했던 삼촌이 조현병 증세를 보이는 등 전쟁의 후유증이 깊게 드리운 집과 나라에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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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재 재건과 동시에 복지의 기반을 탄탄히 세운 핀란드의 복지 시스템에 힘입어, 마리 루티는 가난과 무관하게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고, 마침내 미국 대학으로 진학하게 된다. 이 도전은 마리에게 학문적 욕구보다, 냉랭하고 어두운 집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해방감의 발로였다. 지독히 춥고 문화자본이 결여된 핀란드 변방 출신 여성에게 미국은 편리한 주변 환경, 넘쳐나는 물자, 쾌활한 국민 정서 등 반할 만한 것이 많은 나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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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땅에서 어떻게든 성공하겠다는 마리의 투지는 핀란드인 특유의 기질인 '끈기(susi)'와 만나 '노오력'으로 발현됐다. 개인의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과 연결될 수밖에 없던 시간들이었다.

미국에 적응하면서 '잔혹한 낙관주의'가 공기처럼 배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연원이 유구한 '아메리칸 드림'에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게다 핀란드에서는 거의 발견할 수 없는 젠더 이분법이 매우 공고한 것을 깨닫고, 이것이 우울, 불안, 분노, 짜증, 자괴감, 무력감 등의 '나쁜 감정들'을 유발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것이 마리 루티가 <남근선망과 내 안의 나쁜 감정들>을 쓰게 된 이유다.?'나쁜 감정들'의 근원?마리 루티는 '나쁜 감정들'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 푸코의 '생명관리정치(biopolitics)'에서 라캉의 '욕망의 특정성'까지 동원한다. 개인의 조건을 국가가 철저히 관리하는 '생명관리정치'는 '성'과 '가족'이라는 "따뜻한 가치관"(60쪽)으로 자본주의의 치부를 가리게 한다.

노력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잔혹한 낙관주의'를 완전히 내면화하게 되면, 구조의 결함을 전혀 들여다볼 수 없게 된다. '항상 쾌활하라'는 과도한 긍정주의 메시지는 어쩔 수 없이 밀어닥치는 허무, 슬픔, 억울함 등의 '나쁜 감정들'을 병리화시키며, 개인의 통제라는 목적을 달성한다. 자기계발서가 주로 미국과 한국에서만 풍미되는 현상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시민사회가 잘 작동해야 국가가 유지된다는 믿음은 이성애에 기반을 둔 결혼과 성차를 자연화하려 끊임없이 시도한다. 자본에 제공해야 하는 생산력을 부단히 제공하고, 자본이 유지될 수 있는 소비를 무한히 가능하게 하는 소비를 이끄는 데 가족만한 탁월한 기제는 없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본령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수호다. 결혼은 여전히 '여성은 가정에, 남성은 일터에'라는 성 역할을 고정시키고, 기혼자들을 우대함으로써 이성애 중심주의를 공고히 한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동성애 결혼 합법화'를 실패한 투쟁으로 간주하는데, "결혼만이 의미 있는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개념을 강화"(119쪽)시킴으로써, 결혼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권리와 혜택을 주는 제도를 요구하는 데 실패했다고 비판한다.?여성성을 "재코드화(recoding, 152쪽)하는 포스트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을 진보하게 할까, 후퇴하게 할까? 페미니스트들조차도 여성성을 남성을 안심시키는 전략으로 채택하며, 보다 매력적인 외모에 대한 선호를 부정하지 않는다.

저자는 남성의 시각에 식민화돼 더 섹시해지려는 여성성으로 매력 자본을 획득하는 것이, 어떻게 젠더 이분법을 해체하며 여성주의에 기여할 수 있는지 묻는다. 여성은 감성지능이 남성보다 더 뛰어남으로 이를 활용하라는 메시지 또한 남성의 감정적 무능에 면죄부를 줄 뿐이라고 일갈한다. 결국 포스트페미니즘의 '여성성 재코드화' 전략은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수많은 소비를 병행하게 하며, 자본주의와 성차별에 철저히 복무하게 된다.?영화학자 로라 멀비의 말처럼, 결국 "남성적 시선으로 중재"(166쪽)되는 여성의 몸은 여성의 "자기대상화(self-objectification)"(173쪽)를 극대화시킨다. 남성이 욕망하는 몸에 여성이 자신을 계발시키는 일은 일시적 만족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나쁜 감정 자체를 없애지 못하면서, 어쩔 수 없이 남성우월주의와 공모하게 된다.

대상화된 여성의 몸은 포르노로 극대화되며 자본주의와도 결탁한다. '번 아웃'된 사람들은 관계를 만들거나 지속할 능력을 상실한 채, 성적 판타지인 포르노를 보며 관계를 대체하고, 동시에 막대한 자본시장인 포르노 시장 자본주의에 기여한다.

포르노에 대해선 페미니스트들조차도 상반된 의견을 견지한다. 여성 혐오를 극대화한다며 강하게 비판하는 경향과 성적 상상력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중시하는 경향이다. 저자는 이성애 여성 섹슈얼리티와 포르노는 분리 불가한 영역임을 주장하며, 포르노를 중시한다고 해서 포르노 비평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비판한다.?마리 루티는 1장에서 4장까지 젠더 이분법, 결혼의 특권화, 이성애 가부장제, 포스트페미니즘의 여성성 재코드화를 파헤치다, 5장부터 라캉으로 회귀한다.

푸코의 사회결정론과 다윈의 생물학적 결정론 양쪽을 돌파할 수 있는 대안으로, 라캉이 주장한 "욕망의 특정성(specificity)"(201쪽)에 기댄다. 다치고 쓰러져도 변함없이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야말로, 사회적으로 조건화된 제약에 저항하게 하는 반문화적인 힘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욕망은 '나쁜 감정들'이 생겨날 때, 자본주의와 결탁해 부정적 감정을 빨리 해소하라는 불합리한 행복 시나리오를 거부하게 하고, 나쁜 감정들을 승인함으로써 저항의 기제로 기능할 수 있다.?지은이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결여'야말로 욕망을 생성하는 근원으로 본다.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 인간이면 누구나 어쩔 수 없이 불안한 감정이 생기는데, 이것이 '결여감'이다. 한 마디로 인간은 그저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라는 말이다.

오직 높은 성과와 생산성, 끊임없는 자기계발, 무한 긍정만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불안하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실존적 결여'를 불안하다는 이유로 피할 것이 아니라, 용인함으로써 삶의 새로운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한편, 사회가 구성한 이데올로기가 생성하는 '구조적 결여'감, 즉 성차별, 젠더차별, 인종차별, 신자유주의 등엔 단호히 맞설 것을 요구한다. 구조적 결여엔 저항하고 존재론적 결여는 수용하자는 주장을 위해 저자는 짧지 않은 논고를 끌고 온다.

책은 4장까지 팽팽히 당겨지던 탄력이 5장부터 급격히 느슨해진다. 4장까지 '구조적 결여'를 신랄히 비판하던 페미니스트가 5장부턴 핀란드 소녀로 돌아가, 너무 단순한 나머지 시시하기까지 한 제안을 하며 끝내기 때문이다. 해서 존재론적 결여를 중시하지 않거나 극복한 독자라면, 5장 이후는 넘겨도 좋을 듯하다.?욕망이 해낼 수 있는 것?존재론적 결여를 인정하며 저항의 기제로서 욕망을 좇을 대안으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이렇다. 우선 저자는 자유의 전제 조건으로 받아들인 현대의 "애매성의 윤리"(256쪽)가 관계를 개선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냐고 묻는다. 장기적으로 무기력을 유발하는 "애매성"은 이제 그만 버리고, 대신 "투명성"을 탑재하자고 권한다. 애매함으로 인한 긴 정서적 교착 상태보다는, 그 관계를 버리는 게 더 나은 삶일 수 있다고 설득한다.?또 다른 제안은 정돈하기와 줄이기. '잡동사니를 없애라'는 미니멀 라이프의 주문은, 뭔가를 끊임없이 사들이게 하는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기제로서도 유효하다. 이런 이유로 5, 6장은 자기계발적 경향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데, 검박한 핀란드 시골 여성이 미국이라는 극자본주의 나라에서 살아남으며 체득한 라이프 스타일의 한계이자 가능성이었으리라.?저자 마리 루티는 이제 더 이상 생물학적 '남근'에 화내지 않는다. '권력의 상징'으로 기능하는 '남근'의 권위에 도전할 뿐이다. 그녀는 강의장으로 들어가 강의를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시종일관 자신의 상징적 '팔루스'(발기한 남근상)인 펜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여자인 너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라는 비합리적 성차별 요구에 맞설 힘의 근원이 바로, 그녀의 '팔루스'인 펜이기 때문이다.?최근 간부급 공무원들이 성평등 교육을 받으며 토론을 거부하거나 자리를 이탈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일었다. 당시 강의를 맡은 권수현 여성학 연구자는 경찰 고위직 대상 성평등 교육장에서 "이런 거 왜 해"라는 식으로 남성 권력에 사정없이 난타 당했다고 했다(관련 기사 : "귀찮게 이런 걸 왜..." 예비경찰서장들, 성평등 강의 태도 논란). "이런 거 왜 해"라는 거부가 바로 남근 거세에 대한 남성들의 존재론적 불안 아닐까.

저자 마리 루티의 주장을 다시 반복한다. '존재론적 결여를 승인하라.' 그래야만 보잘것없는 남근의 권위에서 해방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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